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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냉각된 시간 고운 최치선 몸에서 분리된 것은 심장이 아니었다 두 개의 호흡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생긴 부작용도 아니었다 어제의 시간이 삭제되고 오늘을 지나 내일의 시간이 돋아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에서 분리된 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서서히 냉각된 피는 더이상 심장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의 의식은 냉동고 안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고깃덩어리처럼 차가운 남극의 빙산에 닿고 있었다 몸에서 분리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하나의 통에서 죽어가는 시퍼런 청춘처럼 이글거리던 태양은 어느새 잔뜩 웅크린채 보이지 않는 잠 속으로 소리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 더보기
나는 당신의 일부 ​고운 최치선 압록역으로 들어오는 하얀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깜빡거립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이른 아침 당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시계를 꿀꺽 삼켰답니다 가슴속에서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네요 그렇게 해야 안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똑딱똑딱 그 후로 시간은 내 가슴 속에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달려오는 열차를 보았을 때 벅찬 감격을 억누르느라 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당신을 싣고 온 열차는 내 앞을 미끄러지며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시간은 아직도 가슴 속에 숨어 있지요 아마도 당신의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은 꿈을 꾸며 그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똑딱똑딱 시계만이 시간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뿐 텅 비어 있는 압록 역에는 침묵의 그림자만이 열.. 더보기
점층법 또는 정지화면 고운 최치선 ​ 인생이란 밥상은 누군가에게 매일 진수성찬일지 모르지만 어떤이에게는 한끼 곡기를 해결하기 힘들때도 있다 같은 길도 누군가와 가느냐에 따라 즐거움을 주거나 고난을 안겨주기도 한다 사랑도 떠나려 하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뒤돌아보지 말고 가던 길을 가야 한다 가는 곳이 어딘지 나도 모르지만 너를 남겨두고 가야 한다 수 많은 별들이 이 밤을 하얗게 수놓고 함께 한 시간 모든 것이 여기에 살아 있는데 이 길을 떠나야만 하는지 길을 떠나는 낯익은 얼굴들 잊지 않고 나에게 묻는다 앞서 떠난 발자국따라 봉인이 풀린 날의 기억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만큼 초롱초롱하다 시간이 지나 선고가 내려지면 인생밥상도 가던 길도 사랑도 점층법처럼 반복되거나 정지화면처럼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더보기
폭염속으로 고운 최치선 눈물없는 눈은 공허하다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다른 생각이 돌고 있단 사실을 애인의 몸을 훔치고 간 남자들을 떠올렸을 때 감정은 아직 훔치지 않았다는 것 나는 위험한 상상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침묵을 내보내려 한다 그러나 떠들고 싶어도 소리를 내지 못할때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것을 너와 나는 알고 있다 네 눈에 도달할 문장이 기다려진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위태롭게 매달린 햇살처럼 오랠수록 흉기가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8월의 폭염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나는 녹아서 네 눈에 흐른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