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늘

가을의 변방에서 고운 최치선 가을의 변방에서 나는 나무를 준비하고 있다사랑은 언제 강을 건너올까나는 무심히 계절의 중심으로 돌을 던져본다 분홍 햇빛이 말갛게 서러워지는 하늘의 오후흔들리는 나뭇잎 사이 지금 나는 숨어너를 훔쳐보고 있다 바람의 빗으로 머리를 정갈하게 하고손톱에 가을을 그려넣는 너의 등 뒤에 서서사랑해 사랑해라고 속삭였다 무시로 강의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바람이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손가락으로너의 머리카락을 애무했다 이 세상 끝까지 나도 같이 흩날릴 수만 있다면제자리에 가만히 일생의 침묵을 한 겹씩 벗어놓고나무들이 걸어와 내 옆에 몸을 눕히는 시간까지... 더보기
독수리가 사는 법 고운 최치선 ​ ​​​​​​​ 칸의 제국에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흔적을 찾아 떠난 날 독수리는 태양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내가 오래 찾아보지 않아도 독수리는 한 눈에 먹잇감을 알아 보았다 그만큼 하늘의 길에 밝기때문이다 얼마나 자주 어둠 속에서, 그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낮의 형상속에서 독수리는 기다렸을까 안타까운 기다림에 시달리며 세상을 향한 온갖 몸부림이 소용없이 되어버리고 수많은 여행자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날짐승의 심장을 후벼파도 독수리는 오래전 잊혀진 신화를 되찾기 위해 허공에 집을 짓고 자신의 주인이 찾아오기를 수없이 기다린다 독수리의 두 날개가 하늘을 덮고 초원이 잠든 시간 말과 양떼들은 바람을 벗삼아 산책을 나간다 이 초원에서 여름이 물러나면 독수리의 눈 속에는 하얗게 피어나는 눈꽃.. 더보기
고운 최치선 ​ 차갑게 식은 달을 한 스푼 떠서 펄펄 끓는 붉은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자 밤의 문이 열리고 감당할 만큼의 에너지 1200칼로리가 만들어졌다 가슴에 묻힌 소녀의 기억은 아직도 부풀어 오르지 못했는데 집나간 아버지 10년 만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제의 인연을 먹다만 입가 훔치며 한 쪽 어깨 기울어진 세월이 함께 들어왔다 자정이 되자 창문 틈으로 달의 가장자리가 보이고 차례상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어머니의 두 손 합장한 후 달을 뜨기 시작한다 더보기
작은 것이 아름답다 고운 최치선 ​ 노랑으로 허공의 여백을 물들인 산수유를 보며 작지만 결코 작아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하늘의 변화 무쌍함을 따라가지 않고 땅의 광대무변함을 시기하지 않고 본성에 충실하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더하거나 부족하지도 않게 매화의 아름다움을 시기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냄새를 향기로 바꾸는 힘이 그에게 있었다 어둠이 스쳐 가기 전에 작음을 노래하는 산수유 가라앚음 뒤에 떠오름이 잠든 후엔 깨어남이 있듯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꽃잎마저 파장에 몸을 맡겨 중천으로 흘러가도 처음 본 행인의 시선이 닿을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겸손한 산수유의 꿈은 긴긴 겨울 수많은 무서리를 견뎌내고 봄햇살 창공에서 빗물처럼 쏟아질 때 잠깐의 인연으로 세상에 내려와 선물이 되었다 작음으로 빛나는 산수유를 보며 작.. 더보기
봄의 여백 봄의 여백 고운 최치선 ​내 일상으로 숨어든 새들도 떠나고한 그루 나무가 된 그대도 헐벗은 채 흔들리고 아무도 이 돌변을 멈출 수 없고 나도 그대를 볼 수 없음에 과연 대신 아파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 온 그대 얼굴만큼이나 햇살이 곱게 느껴지는 봄 날 오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햇살 한 줌 포장해서 이미 잊어버린 번지로 택배 보내고 뜨겁게 오열하는 일뿐 내 눈에서 그대 모습 사라지는 날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이었던 그건 기만이고 허위이며 거짓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대를 끄집어내고 품안에서 오래도록 느끼고 싶었다 햇살이 곱던 봄날 오후 서로의 뿌리와 꽃의 안부를 물으며 체온을 쓰다듬고 위로를 나누어주는 그래서 밖이 아닌 안에서 서로의 봄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