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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새 살은 여름의 상처를 치유한다 고운 최치선 벗겨진 무릎의 상처도 나무의 껍질도 바위의 표면도 시간과 바람에 의해 새 살이 돋는다 새 살은 여름의 상처를 치유하고 손타지 않은 깨끗한 가을하늘로 바뀐다 눈에 들어 온 북한산의 나무들도 어제의 투정을 버리고 나이테가 하나 늘어난만큼 사랑스러운 얼굴로 변한다 사랑스러운 얼굴은 희미해지고 아픈가슴도 공기에 닿을 때처럼 기억의 부스러기를 본능적으로 쏟아낸다 기억속 하늘과 땅, 바람과 태양, 여자와 남자, 핏줄과 신경, 맥박과 근육의 수축, 피와 심장의 팽창들이 충돌하면서 만난다 하늘은 다시 격렬한 몸부림으로 물렁물렁해지다가는 딱딱하게 굳고 부풀어오르다가 쪼그라드는 열정의 반복 열정은 꿀벌이 꽃잎과 꽃샘에 집요하게 날개를 문질러대고 날개는 자꾸만 벗겨져 화끈화끈해지며 극도로 예민해져 새로운 세포가.. 더보기
폭염속으로 고운 최치선 눈물없는 눈은 공허하다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다른 생각이 돌고 있단 사실을 애인의 몸을 훔치고 간 남자들을 떠올렸을 때 감정은 아직 훔치지 않았다는 것 나는 위험한 상상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침묵을 내보내려 한다 그러나 떠들고 싶어도 소리를 내지 못할때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것을 너와 나는 알고 있다 네 눈에 도달할 문장이 기다려진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위태롭게 매달린 햇살처럼 오랠수록 흉기가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8월의 폭염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나는 녹아서 네 눈에 흐른다 더보기
여름연가 고운 최치선 명동역 4번출구를 빠져 나오면 내 눈 설레게 하는 쇼윈도우 마네킹 란제리도 빨간 망사스타킹도 알록달록 액세서리도 철지난 연모로 만든 털장갑 양손에 끼고 이별이 한데 뒤엉켜 뒹구는 신축 백화점 1층 로비에 여름맞이 역시즌 파격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자 마네킹들이 서 있다 모서리가 닳아버린 애인의 손톱을 묻고 돌아온 저녁 만월이 명동 한 복판에 떠 있고 내 눈를 찌르는 하얀 가로등 불빛도 개념없이 서 있는 전봇대의 생식기를 비추고 오늘이 다 차면 달의 소유시간은 단축될 것이다 명동에서 본 쇼 윈도우 속 마네킹도 알몸일 때가 절정이다 행인들의 눈에는 서로 다른 가격표가 붙어있고 달빛은 잘 익은 눈 하나 비추면서 주인을 기다린다 물음표도 사라진 거리에는 헤어진 연인의 두 .. 더보기
감기 ​ 고운 최치선 폭염이 계속되는 8월 개도 안걸리는 감기에 걸렸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까지 지독한 고열과 기침에 시달렸다 목울대에서는 굳은 소신과 후회가 덩어리채 솟구치고 눈물 콧물 쏟아낼 때 지난 계절이 무시당한 복수라도 하는 듯 끈적끈적 점액질을 토해낸다 나는 아스팔트 검은바닥을 노려보며 이미 사라진 가을하늘을 떠올린다 밤새워 내 곁에서 툴툴 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도 더이상 희망이 없다며 찬바람을 버리고 무풍지대로 떠나버렸다 텅빈 도시에 뿌리내리는 햇빛은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지하가 지하가 되버린 후 햇빛은 닿지 않았고 바람도 용케 피해갔다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면역력이 떨어진 내 몸은 너무 쉽게 삶의 바깥으로 이탈했다 그러자 유리처럼 번뜩이는 슬픔을 안고 감기는 전속력으로 나.. 더보기
진관사 입구에서 진관사 입구에서 고운 최치선 ​북한산 진관사 입구 왕벚꽃나무 아래나를 닮은 여인이 서성이고 있다 마르고 큰 키에 각 진 얼굴 반백의 머리카락 주름진 이마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좁은 어깨를 움츠리고 돌아선 구부정한 허리마저 비슷하다 나와 닮은 저 초로의 여인은 어떤 완보완심의 삶을 꾸려왔을까 오래전 훌쩍 떠나버린 바람같은 남자를 그리워하며 나무 밑을 서성이는 것일까 여인의 벚꽃 물든 머리 위로 하나 둘 생이별한 벚꽃이 떨어지고 나는 퇴락한 봄의 끝을 바라보며 미래가 된 여인의 마음을 서성거린다 더보기